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 (고전 4:1-2)

작성자관리자

  • 등록일 21-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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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충성이란많이 말하고 듣고 또 충성할 것을 다짐도 하고 충성한다고도 하지만 막상 충성이란 무엇이냐?’ ‘어떻게 하는 것이 충성이냐?’ 고 했을 때 이것이 충성이다라고 선뜻 대답하기는 어렵다. 과연 충성이 무었일까?’ 각자 마음대로 대답해 보라.

충성의 낱말 풀이를 사전에 찾아보면

1.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는 것

2. 참 마음에서 우러나는 충의의 정성

그러나 우리가 이 낱말풀이로 기독교가 말하는 충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 우리가 충성이라 말하는 이 충성에는

1. 성경적인 뒷 받침이 되어야 하고 2. 신학적인 배경에 따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충성하라.” “충성한다.‘고 했을 때 간단하게 참으로 충성하는 구나.“하고 말하기 어렵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맡은 직책에 충성해야 한다.“고 하고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고 했는데 무엇이 충성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충성인지 확실이 알고 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못하면 충성한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반역이 될지도 모른다. 충성에는 세가지 요소가 있다. 라고 하고 싶다.

A.진리에 입각한 것이 충성이다. 하나님의 뜻에 합의한 일이 충성이다.

: 자식이 부모엑 효하려면 부모의 뜻과 교훈에 입각해서 그 뜻. 그 교훈에 순종해야 그것이 충성이지 부모의 뜻을 거슬려가면서 효한다고 하는 것이 참 효가 될 수 있겠는가.

부모에게 효한다고 남의 것을 훔쳐서 봉양한다면? 그러다가 쇠고랑을 차고 철창에 간다면?

우리가 주님게 충성한다고 하면서 진리에서 벗어난 일을 자행하면서 충성한다면 그석이 어떻게 충성이 될 수 있겠는가?

: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라

저가 사울 당시에 어떠한 인물이었던가? 3:4 이하에 화려한 가정 배경과 뛰어난 경력의 소유자였음을 자기 스스로 자랑했다. 난지 8일 만에 할례, 이스라엘 족속, 벤야민 지파의 자손한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여기에서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고 생을 주님께 바쳐서 충성한 것이 아니냐? 진리에 서지 못하고 충성한다는 그 충성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 수 없다.

: 전도관 박태선 집단 전성기에 그 무리 중 한 광신자가 삼각산에서 기도한다고 하다가 삼남매의 자녀를 목밟아 죽이는 계시를 받았다고 집에 돌아가서 다 죽였다. 동아일보에서 박대선 이단 집단이라고 보도했다고 동아일보를 습격하고 그 보존철을 불살라 버렸다. (계시, 환상, 그런 것을 보고 예수 재림 공중 휴거 1992.10.28.사건)

진리를 바로 알아야! 어떻게 성경 말씀을 통하여 성경은 1. 하나님의 계시 2. 진리의 척도 3. 영의 양식(생명의 떡)

이 성경을 읽고 명상하고 그 말씀대로 생활하는 것 이것이 곧 충성이다.

백도천경-성경에 무식하고 기도한다고만 하다가는 별별 이단 사설에 빠지게 되고 그릇된 일에 충성하면서도 그것이 올바른 것으로 착각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 본인의 경험- 일정 때, 성경을 몰라서 신사참배에 굴했었다. 영국의 죠지물러 목사의 독경법에서 1. 정규적으로 2. 기도하며 3. 명상하며 4.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알고 진리에 서서 충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

B. 직책타수가 충성 내가 맡은 일을 잘 지키는 것즉 성심성의 것 지키는 것 성력을 다 하는 것 우리는 충성하면 먼저 어떤 성과를 머리에 그린다. 교회생활을 살피면

1. 얼마나 교회 부흥을

2. 얼마나 많은 예산을

3. 얼마나 많은 일을

세상에서는 큰 승리 큰 성공을 충성이라고 그렇지 못하면 불출, 무능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사실이다.

성경은 그렇지 않다

: 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

5달란트 받은자.....다시 5달란트를

2달란트 받은자 .... 다시 2달란트를

1달란트 받은자 .... 그것으 뭍어두었다.

이유는 내 역량을 남김없이 기울임이 충성임을 뜻한다. 결코 성과는 아니다.

: 예수님의 지상생활에서 예수님 같이 깡그리 실패한 사람은 없다.

3년 선교에 12제자 그 중에 1명의 반역자

멸시, 천대, 박해와 핍박

십자가 처형

정말 이것이 실패냐? 하나님의 뜻을 성취 하심이 아닌가?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시려 하시는 나님의 그 거룩하신 뜻을 성취하심이 아니였던가?

: 버무에 가서 선교한 저드슨 선교사는 3년 선교에 한 사람도 구원 못했다. 본부에서 돌아오라는 송환장을 발송 그 대답은 눅13:8-9 그리고 나서 그해에 한사람(자기 비서) 오늘에 와서 그 불교국가 버마에 개신교 교역자가 수백명 탄생하였다. 충성은 내 맏은 일에 얼마나 성심성의를 다했는가에 있다.

아무리 좋은 성과를 거두었어도 성력을 다하지 않는 것은 충성이 아니다. 작은 일에라도 내 있는 힘으 다 했을 때 잘했다 칭찬이 있을 것이다.

성력을 기울려 충성하는 자 되기를.....

1.절개를 지키는 것이 충성

한문 글귀에 世寒知松栢(날씨가 차가워질 때 송백의 절개를 알고)

世亂知忠臣(세상이 어지러울 때 충신을 안다)

患難知聖徒(환란과 핍박에 성도를 안다.)

: 옛날 중국 은나라에 백이와 숙제라는 형제가 살았는데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될 때 주에 살수 없다하여 수양산에 들어가 서산에서 고사리를 캐 먹다고 죽었다고 ..

우리나라에도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 태조가 조선와국을 창건하고 충신 정몽주를 개성 선죽교에서 피를 뿌리고 죽었다지요. 그래서 그 다리를 선죽교라 칭함. 피흘린 자리에 대나무가 났다고 전해짐. 대나무야 났겠는가 마는 그 절개가 대나무보다 시프르지 않는가?

이성게가 새나라에 충성할 것을 한편의 시로 권했을 때 역시 시로 대답한 것이 그 유명한 시가 아닌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다시 죽어

백골이 진토되고 넋이야 있건 없건

님 향한 일편단심 변할 줄이 있으랴

이것이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의 나라 사랑하는 충의 대절이었다.

그런데 나라사랑하는 충의가 이렇다면 우리 크리스챤들이 어떻겠는가? 구약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풀무불에 다니엘은 사자굴에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고 바울은 단두대에서 목이 끊겨 죽었다.

AD200년 칼타코의 밸배추어라는 여성도는 22세의 어린 나이에 사나운 소뿔에 받쳐 죽었다.

일제 때 한국의 순교자들!

: 고 주기철 목사 그의 마지막 설교 <나의 오종목의 기도>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옵서서

장기간의 고통을 이기게 하옵소서

노모와 처자식 그리고 교우들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네 번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라는 대지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몸이 어려서 예수님 안에서 자랐고 예수께 헌신할 것을 열 번, 백번 맹세하였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밥을 먹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이말은 신사 참배를 뜻함)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진 오늘 이 몸이 어찌 <芶芶盜生> 피할 줄이 있으라? ! 내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루살렘 도성 내 평양아! 영광이 네게서 떠나가는구나.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세 만세 흘러가며 나와 같이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가리다. 누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기근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ㅇ나 칼이랴? 죽고 죽고 일백번 다시 죽어도 주님 향한 대의 정절은 변치 아니하오리다. 십자가!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 앞에 이 몸 드립니다.

초로인생 살면 며칠입니까? 인생은 짧고 충의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 다음 주일에 평양 선교리 대동 세 경찰서의 형사에 체포 당하여 어머님께 마지막 하직 인사를 드리고 평양 경찰서에 투옥당함.(1940) 19444.21. 9시에 별세(순교)

유언 : 나 죽은 후에 내 고향 우성으로 가져가지 말고 기독교인들이 잠들어 있는 기독교 공동묘지(돌박산)에 날 묻어주어요(그 곳에 안장 됨)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수여 받음. 그리고 몇 해후 유족들로부터 유품 몇점을 받아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에 안치됨. 그 때에 33인 중 한분이신 신석구 목사님도 )

이외에도 많은 순교자가 있다.

: 고 김상도 목사(본인의 외종형)

평남 강서군 강선교회에서 온가족이 순교 평소에 부르던 노래(헌신가) “내 천한 몸이라도 주님께 바치오니 주어 받아 주옵소서.”